이 책은 모든 지식이 이미 융합의 산물임을 상기한다. 이 책은 또 독창적인 글쓰기를 위해 자신이 아는 바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10쪽)
새로운 지식, '나'와 지구를 살리는 지식을 생산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 글쓰기는 그중 하나다. 융합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가치관, 연결 능력이다.
(11쪽)
글쓰기는 내가 내 몸을 타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그런 글쓰기의 핵심적인 방법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융합'이다.
(15쪽)
융합과 가장 가까운 말인 '트랜스'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도란스'라는 후기 식민 언어를 낳았다. 110볼트(V)와 220볼트(V)는 상호 전환하지 않으면 물건이 망가지거나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융합은 몸의 환골탈태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호소할 때의 '뼈를 깎는 아픔'이 이것이다. 이런 어려움 없는 어정쩡한 변환에 그친다면 그것은 글쓰기의 두려움 때문이다. 독자와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과 자기 검열과 좌절에 시달릴 때, 윤리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글을 불태워야 마땅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쓴 글을 버리지 못하고 사회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면? 내가 늘 꾸는 악몽이다.
(19쪽)
허름한 내 차림새를 본 백화점 식품 매장 직원: "어떻게 오셨어요?" 나: "전철 타고 왔는데요." 직원: "아니...... 어떻게(왜) 오셨냐니까요(나가주세요)!" 나: "(빠른 영어로) 데리(낙농 제품) 파트가? 프랑스산 에멘탈 치즈 포션으로 파나요?"(내가 규범적인 옷차림을 한 여성이었다면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몇 개의 영어 문장을 외워 두고 동문서답용으로 사용한다.)
(37쪽)
저절로 생긴 말은 없다. 말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사회적 약자는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다. 애초부터 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foreclosure)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 하면 백전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자기 관점에서 기존 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39-40쪽)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어 공부에 관해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첫째, 모국어가 정확해야 외국어도 의미가 있다. 그래야 '2개 국어'가 가능하다. 외국어도 모국어도 배운다는 이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를까. 둘째,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자체는 지식이 아니다. 도구일 뿐이다. 영어를 절대시하기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든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가 되면 저절로 통역이 제공된다. 세상은 콘텐츠를 원한다.
(127쪽)
융합과 가장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꼽으라면 환원주의가 대표적일 것이다. 변화무쌍한 현실을 한 가지 원리로 설명하려는 단순 논리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인들의 대화는 "하여간 언론이 제일 문제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 역시 이런 식의 발언을 많이 한다. "한국은 서울 중심주의가 제일 문제야. 계급, 젠더, 부동산 문제도 다 수도권 집중 때문이야."
이른바 '깔때기 언설'인 환원주의는 만사의 원인이 한 가지라는 얘기다. 환원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방식이지만 한편으론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편하고 '매력적'이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내부에는 다양한 이론이 있지만, 처음 접할 때는 환원주의에 빠지기 쉽다. 환원주의는 동어반복의 논리인데 제도권이나 주류의 탄압을 받을 때, 환원주의적인 경향이 더욱 강고해진다.
융합은 환원주의와 반대의 길을 간다. 환원주의가 멈춤이라면 융합은 지속적인 이동, 재해석이다. 재해석은 창의력의 발판이고, 창의력이 필요한 이유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융합 능력, 즉 '공부를 잘하는 방법'은 기존의 언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른 앎과 만나 혼란을 느끼면서 기존 개념에 의문을 품고, 차이와 경계의 기준을 재설정해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안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환원주의는 이런 과정이 필요 없다. 현실을 자신이 믿는 공식에 끼워 맞추고,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면 끝이다. '적용'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문제는 현실이 언제나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178-179쪽)
융합과 통섭은 어감 때문에 '더하다, 만난다, 통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구획, 분리, 절단도 융합이다. 융합 방식은 맥락에 따라 합하거나 분리하는 것이지, 무조건적 만남이 아니다. 합하는 과정에서도 분별이 필수적이다. 구분이 융합의 핵심인 이유다.
(180쪽)
밑줄 좍좍 긋고 싶었던 문장들과 함께 피식거리게 하는 문장이 많아 즐거웠던 정희진 선생님의 글
말로 인해 화를 부르거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을 면하는 방법은 침묵뿐이지만, 침묵 여부를 결정하는 일도 판단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185쪽)
한글 전용론은 우리말을 적을 때 한자나 영문을 쓰지 않고 한글만 쓰자는 주장이다. 한문 혼용론과 더불어 논쟁의 역사는 길고, 싸움 나기 좋은 주제다. 한글 전용론이라는 말 자체가 '한글'에 '전용론'을 더한 말로, 한글 전용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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